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보수주의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유주의
한국의 역사 속 ‘자유주의’의 이중성을 파헤치다
현재 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환영받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성숙한 사회가 아니라고 보고 있으며, 보수 진영에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를 보다 확실히 하자는 입장과 더불어 개혁과 복지로 인해 개인의 재산권이 침해당할 우려에서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후자의 동기, 즉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서양 근대 역사에서 자유주의의 유래 자체가 강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논리였던 점을 지적하고, '자유'를 외치는 사람 사이에도 그 내용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나를 보여준다.
삶의 최소한의 권리와 인간다운 품격을 위해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재산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지배층은 자유주의를 보수적으로 이용하면서 자유라는 단어에 온갖 화려한 수사는 다 갖다 붙였다. 그럼으로써 은연중 '자유'의 개념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
이 책은 또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독립신문]으로부터 찾고 있다. 한국 근대화 초기의 자유주의의 담론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주의란 무엇이며 자유주의 일반이 갖는 문제는 문제인가를 검토하였다. 나아가 선의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보수적 함의를 아울러 경계하고자 한다. 특히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자유주의의 초기 형태와 구체적 담론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자유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검토할 것이다. 즉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지니는 이중성을 밝히고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유주의가 지배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주의임을 드러낸 책이다.
왜 자유주의를 다시 논해야만 하는가
저자에 의하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자유를 외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보수적 정치가들이 자유민주 사회를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것을 “보수주의”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에서 자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늘 보수주의자였다”고 주장하며 묻는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 보수주의자와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혹시 자유 또는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가능성은 없는가?
저자는 자유주의가 “봉건제와 절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 평등의 인간상과 합리주의를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과 교양을 지표로 하여 빈곤한 계급을 정치과정에서 제외시키고 자산가 계급에 봉사한다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브리태니커)는 의견에 동조하며, 한국 자유주의의 모습에서 기득권 세력의 보수적, 극우적 태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최초로 전파된 것은 대중을 상대로 펴낸 [독립신문]이었다고 판단하며, “그동안 유교에 의해 경시되었던 이익 개념과 상업에 대해 재평가하며,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과 경제적 독립을 강조한 [독립신문]”의 담론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이익을 추구하고 경쟁심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로 경도되고, 나아가 제국주의를 미화하게 된 사실을 비판한다. 바로 이것이 한국 자유주의의 면모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래서 현재 자유주의가 다시 강조되고 있다면 그 특징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일반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
우선 자유주의 일반에 대한 내용이 제1장에서 검토된다. 자유, 평등, 인권, 박애 등 호의적인 개념들은 수용하고 악의적인 개념은 배제해나간 자유주의의 나누기와 묶기의 횡포를 고발하며, 자유주의 또한 민족주의나 파시즘처럼 몇 가지 단순한 가정들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다든지, 모든 인간은 합리적 계산자라든지’ 등등… 따라서 자유주의의 선언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또한 자유주의는 ‘여유 있는 자들의 이데올로기’로서 다수의 복지를 의미하는 민주주의, 즉 정치적 자유주의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는 경우는 주로 그들의 재산권이 위협받을 때이며, 자유주의가 등장한 계기 자체가 유산자 계급이 자신의 재산권을 법적, 정치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저자의 근거다. 사실상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의 경제생활만 침해하지 않는다면 독재 정권이든 왕권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 권력과의 공존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정치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어떠한 자유가 자유주의에서 주장되는지가 전개된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자유는 ‘개인주의적 자유’라고 판단하는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곧 강자, 강자는 곧 독립, 독립은 곧 능력이나 재산을 의미한다는 도식을 유추한다. 독립이란 자립과 건설을 필요로 하는 근대 시기의 개념으로서, 시대가 요청하는 필요이기는 하지만 ‘진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관계는 ‘독립’이 아닌 ‘상호의존’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적인 개인의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는 자유주의는 다시 논의되고 합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 자유주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대안 모색
‘[독립신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의 초기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이후의 우리나라 정치역사의 지배이념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2장에서 전개된다. 정부 고위 관료의 후원 아래 개화파 지식인에 의해 창간되어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친 [독립신문]이 당시의 총체적 사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이 청년 시절에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독립신문] 주필인 서재필 밑에서 개혁 이념을 배웠다는 점, 따라서 우리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실은 바로 [독립신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들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어 그동안 유교에 의해 경시되었던 이익 개념과 상업에 대한 재평가,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 강조, 경제적 독립을 강조한 [독립신문], 즉 한국 자유주의의 내용이 제3장에서 검토된다.
[독립신문]이 양반을 비판한 이유 역시 자유주의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임을 부가한다. 이어서 이와 같이 이익 추구 및 경쟁심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로 이끌렸으며 제국주의 사상을 미화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제4장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반민중적이라는 시각이 제5장에서 후렴된다. 다수의 지배와 독주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를 구별할 것을 요하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 개념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던 사정을 살펴본다. 1848년의 사회주의 혁명에 맞서 다수의 사회 세력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외관상 공정한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믿음을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게 그 사례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는 서구 자유주의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민권의 신장이 아닌 민권의 제한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어 [독립신문]이 백성과 신민, 인민과 국민 등 여러 가지 ‘민’의 개념을 그들의 의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썼다는 주장이 차분한 분석을 통해 뒷받침된다.
위와 같은 논지를 통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적극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그것을 방치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를 적극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것에 종속되는 다수의 이로움을 필연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지배 이념인 자유주의가 재고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그 고려의 과정에서, 자유주의의 일반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국 자유주의의 맹점을 파헤치는 이 책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