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몸의 현상학_사유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세계로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입장은 사변이 아닌 세계의 사태성에 입각해 본질을 연구하고자 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몸과 정신의 분리를 전제로 초월적 의식의 귀환을 추구한 후설의 현상학을 뛰어넘어 몸과 대상 간의 상호 공동작용에 의해 지각 현상이 실현된다는, 이른바 ‘몸의 현상학’을 폄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 철학세계를 구축해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유하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각하면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의식에 억눌려온 몸과 감각이 복권된 셈이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은 그의 예술론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며, 예술의 존재 형식은 철학의 그것으로 변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_언어와 회화의 표현성
그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고 지시하는 수단이라는 기존의 도구적 언어관에서 벗어나, 언어는 이성에 의해 단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존재의 발원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침묵적일 수밖에 없는 무언의 언어는 회화나 문학 같은 창조적인 예술작품의 표현 방식이며, 예술 작품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를 가시화하는 방식, 즉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메를로 퐁티는 현대 회화에 대한 말로의 분석을 수정한다. 회화의 재현성에 반대하고 회화와 언어의 표현 형식이 동일하다는 데 착안한 말로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한편, 말로가 화가의 주관성을 강조하고 현대 회화가 비현실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련성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퐁티는 세잔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거기서 드러난 형태의 왜곡은 비현실 세계의 구현이라는 말로의 관점과는 무관한 세계의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서 개념이 아닌 침묵, 사유가 아닌 표현, 일의적 의미가 아닌 다의적 의미라는 예술의 존재 형식은 철학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철학적 입장은 근대 철학의 근간을 뒤흔든 해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장르 통합적인 현대 예술, 그리고 규범과 가치들이 혼란에 빠진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