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의 풍운아
■ 희대의 풍운아 백운곡(종윤)의 처절한 삶, 아름다운 종언終焉
섬진강 젖줄에서 태어나 혹독한 인생 질곡의 늪에서 몸부림친 전대미문의 작가이자 도인道人, 그리고 한 종파를 창종한 백운곡 종정의 가슴 속에 흐르는 파란만장한 삶의 애환, 그 결정체를 서슴없이 이 세상에 공개한다!
수없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오히려 인생의 큰 스승이 되어
현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삶의 의지를 안겨준 더더욱 큰 이정표가 된 사나이.
외롭고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면 실존인물 백운곡(종윤)을 생각하라!
그러면 희망과 용기가 용솟음칠 것이다.
■ 대강의 줄거리
철민(백운곡)은 7대 독자로 태어나지만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가하는 바람에 엄혹한 세상에 맨몸으로 내던져진다. 그 뒤의 철민은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꼴망태꾼, 지게꾼, 머슴살이, 차 정비공, 조수, 운전사, 상차꾼, 약초꾼, 엿장수, 만화방 점원, 풀빵장사, 일용품팔이, 넝마주의, 암흑가 보스 등등 밑바닥 직업들을 전전하게 된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철민은 8세부터 언제 어디서든지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잠시 성제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운 것이 전부인 철민은 독학으로 운전면허 시험, 공무원 시험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공무원 시험에 여러 번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철민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지만, 하는 일 일마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러자 철민은 생을 비관하고 세 번에 걸친 자살 시도를 감행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때마다 실패로 끝나게 된다.
쉽다고 생각했던 공무원 시험에 낙방해 실의에 빠진 철민은 어느 날, 우연히 찾아 들어간 어느 철학관에서 ‘관운이 없어 아무리 실력을 쌓아도 시험에는 실패할 것이다’는 말을 듣게 된다. 철민은 그날 그 역술인과 대판 싸우고 난 뒤 오기로 사법고시에 도전하기로 한다. 사법고시에 열과 성을 다하던 어느 날 철민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러자 철민은 사법시험을 보지도 못하게 되자 죽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재가한 어머니에게 도와달라고 혈서로 된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자마자 서울에서 달려온 어머니와 이모의 도움으로 철민은 서울의 이모님 댁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이모님이 철민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묻자, 철민은 거침없이 역학가가 되겠다고 얘기한다. 이모님이 자신의 결혼반지를 팔아 학원비를 마련한 철민은 은성거사에게 역학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을 사사한다.
그 뒤 철민은 역학가의 길을 걸으면서 한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되고, 다수의 육필 원고를 포함해서 100여 권의 저서도 집필하게 된다. 철민은 유명 서예가로도 활동하게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다. 또 철민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는 파란의 인생길을 걷으면서 불교 종단도 창종(創宗)하고 종정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평화로웠던 가정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날품팔이로 삶을 유지했고, 심한 때에는 초근목피로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그래도 안 될 때에는 굶기가 일쑤였다. 농토라곤 쌀 두서너 가마, 콩 한두 가마가 전부였다.
살길이 막막한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네 살 난 철민이를 데리고 재가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씨받이 재혼 내지 호구지책을 위한 결혼이었다.
왜냐하면 재혼 당시에 딸을 다섯을 낳아 기르고 있는 본처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후사를 보기 위해서 어머니를 씨받이로 들인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버릴 수 없는 물건, 그것도 골치 아픈 혹인 철민이를 데리고 재가한 것이다.
*
철민의 나이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마을 어귀 주막집(구멍가게 비슷한 술집)에 꼴망태를 깔고, 술 먹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자 희망이 돼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술 먹는 사람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빵쪼가리와 오징어 다리를 던져주곤 했다. 이러한 음식을 먹는 재미가 쏠쏠하여 꼴망태만 매고 나서면 그 주막집에 가서 술 먹는 사람이 던져준 과자며 오징어 다리를 똥개처럼 받아먹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자 행복처럼 느껴졌다.
*
철민이는 당숙모의 간곡한 부탁에 그 공부방을 어렵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을 생각 외로 빨리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철민이의 가슴속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 가는 또래들을 보면 부러워했고, 그 부러움에 못 이겨 남모르는 눈시울을적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던 철민이가 독학으로 상당한 한문 실력을 갖춘 것도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다. 오히려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
사랑방에서도 철민이는 여전히 공부를 계속했다. 다른 머슴과 같이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고, 꼴망태를 만드는 등 머슴으로서 할 일은 다 하면서 다른 머슴들이 잠잘 때 철민이는 호롱불을 가려가며 외로이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에게 눈물어린 간청으로 서당을 다시 다니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초저녁에 할 일을 서당에서 먼저 공부를 한 까닭에 머슴들이 잠이 들고 있을 때 멍석 만들고, 새끼 꼬는 일을 하기 때문에 머슴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야! 철민아 머슴 주제에 뭔 공부를 해. 공부 더해서 정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할 것도 아닌데, 잠도 안 자고 올빼미처럼 공부만 해. 어서 불 꺼, 인마! 너 때문에 못 살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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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눈이 뽀얗게 내리고 혹독한 겨울이었다. 철민이는 친구 병주네 작은 방에서 만들고 있던 멍석(덕석 방언)을 집어치우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전북 남원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막상 결심을 하고 보니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머슴살이를 하면서 마땅히 잠잘 자리가 없어 회관이며, 선신기 집이며, 전광수 방 등을 전전긍긍하다가 병주의 배려로 불이 나 새카맣게 타 버린 사랑채 방을 빌려주면서 우선 여기서 자도록 하라는 등의 추억은 출세하겠다고 결심한 철민이의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꼭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든 고향 땅을 떠나야만 했다. 때는 바야흐로 철민이 나이 19세에 전북 남원행 버스에 몸을 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차창 밖을 보면서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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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 조수란 직업이 무엇을 하는 거냐고 반문할 정도로 생소한 직업이지만 1960년대에는 화물차, 버스는 물론 택시마저도 조수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버스에는 조수 아래에 차장(車掌)까지 두어 서열로 따지면 차장, 조수, 운전사 식으로 구성돼 있었다. 운전사는 물론 차장 조수란 직업은 그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내면을 살펴보면 월급보다 외수입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오일장날 같은 때에는 과외 수입이 많았다. 그 이유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하지도 않고 소말 달구지(우마차)가 주류이고, 반면 농산물을 팔아야만 현금을 만져 볼 때라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짐(화물)이 많아 장날에 장터를 경유하게 되면 쌀 한 가마는 운임이 얼마, 사람 한 명당은 운임이 얼마 등등 실로 놀라울 만큼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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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지 않은 그믐에는 조수들의 절호의 기회이다. 왜냐하면 껌껌해서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좋은 기회인 셈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처녀, 기혼 여성 등이 많이 모여 목욕을 하게 된다. 이러한 기회를 봐 조수들이 잠수 목욕을 같이 한다.
그 당시의 사회 젊은이들은 장발이 많을 때라 어두운 밤에 목욕을 하게 되면 여성 단발 머리카락인지, 남성 조수들의 머리카락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조수들은 물속으로 잠수하여 처녀들의 몸과 스치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을 일부러 스치는가 하면 때로는 만지기까지 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성인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묵인한 처녀들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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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를 그만두고 하숙을 하면서 운전 면허시험 공부와 일반행정직 시험에 대비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 대신 조수 일을 하고 있던 김종우가 전북 부안에서 토목공사를 하던 중 차를 정비하다가 덤프가 내려와 깔려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철민이가 그 차 조수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니까 철민이가 현정리에서 나무하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것이나, 종수가 철민이 대신 잠깐 조수로 갔다 죽은 것이나, 이번에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부안 가서 불귀의 객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 경우를 생각하면 철민이는 20대 초반에 무려 세 번의 죽음을 빗겨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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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만 따면 만병통치 만사형통(萬病通治 萬事亨通)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철민이의 삶은 정반대였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철민이는 밤잠을 설치며 차 정비도 완벽하게 하고, 공부에도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마땅한 기숙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함바집(공사 인부들 밥 먹는 식당)에서 자거나 아니면 차에서 자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건축 현장이라 본인 밥도 손수 해먹어야 하고, 시장에서 부식도 사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전사가 운전하는데 불만이 없도록 차 정비도 꼼꼼히 해야 하며, 짬을 내 공부도 해야 하는 등 실로 면허가 없을 때의 조수만 못한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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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며칠간 운전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넝마주의 총대장이란 것이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조폭 보스인 것이다. 총대장 아래에 20~30명씩 넝마주의를 데리고 있는 구역장 즉, 중간 보스들만 수십 명에 달했고, 총 인원은 400~500명 정도였다.
전주 시내 다리 밑의 집합소만 서서학동 다리, 중화산 다리, 용머리 고개 다리 등 수십 곳이었고, 다리 아닌 대표적인 집합소는 노송동, 용머리 고개 개천 근처 효자동 등 역시 수십 군데였었다.
또 전라북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곳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중 오수, 순창, 남원, 김제, 이리, 군산이 대표적이었다.
총대장인 신기영(가명)은 중간 보스들을 모아 놓은 각종 고물과 넝마를 수집하여 공장에 직접 판매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돈은 번다고 하기보다는 주워 담는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었다.
철민이가 하는 일은 바로 각 집합소마다 다니면서 고물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총대장인 신기영 사장과 같이 다녔지만, 점점 익숙해지자 철민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철민이 혼자서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철민이 자신이 총대장 행세를 한 것이다. 다리 밑을 가면 수십 명 넝마주의들이 차렷 자세로 인사부터 하고, 그다음 본 업무에 들어가는 것이 그 계통의 하나의 룰이었다. 그러니 철민이도 자연히 그들을 닮아간 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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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묘한 인연에, 끈이 다가왔다. 한때 암흑가 보스로 있을 때 알게 된 김영춘(가명), 일명 갈고리가 갑자기 찾아왔다. 갈고리라는 별명은 오른손이 절단 돼 의수(義手)를 쇠갈고리로 만들어 누가 보아도 위협적이었다. 얼굴은 칼자국 흉터가 여기저기 있었고, 한쪽 눈마저 실명돼 그 자체가 험상궂게 생긴 것이다. 만약 음식점이나 술집에 가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탁을 갈고리로 찍어 뒤집어엎는 등 대하기 힘든 친구였다.
갑자기 찾아온 영춘은 철민이에게 전주로 다시 가자는 것이었다. 철민이가 완강히 거절하고 다음 어느 때까지 오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몰아 멀리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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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이는 낙방의 상처가 의외로 큰 것은 그만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철민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전주남문시장 개천 변에 위치한 철학관을 들어가 공부는 남 못지않게 자신하는데 왜 시험에 떨어질까요, 하고 당돌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당시로는 알아듣지 못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사주에 관성(官星, 명예, 벼슬, 직업을 상징)이 없어.”
철민이는 자세를 가다듬고, 불쾌한 어조로 따지듯이 물었다.
“관성이 무엇인데요? 그런 것이 뭐가 필요해요? 아 공부 잘해
서 실력 좋으면 시험은 당연히 합격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관상이 무슨 합격을 좌우해요”
안경 너머로 철민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노인은 철민이의 말이 기가 찬지 혀를 찼다.
“자네 같은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기도 싫으니, 어서 가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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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험발표를 기다리면서 광주에서 사 온 《역술전서》를 열심히 보았다. 그 책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 전문인이 아니어도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하여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야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지만 과거를 보니까, 부선망(父先亡,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것)을 운운한 것과 조출타향(早出他鄕, 일찍 고향을 떠나온 것)이 이러고저러고 한 것 등 실로 눈으로 보듯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철민이는 어쩌다 그런 것이지, 누구나 다 맞겠나, 미신이야 미신, 사법고시 합격하여 판검사가 될 내가 이런 미신을 믿다니, 이런 것은 낙오자들이나 보는 것이지, 참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건방지고 인간 이하로 취급될 생각과 말이었다. 그때 생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 있고 빽 있고, 머리 영리하면 최고라는 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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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월은 흘러 겨울이 다가 와 철민이가 강원도 온지 어언 3년이 다된 것이다. 삶이야 어쨌든 철민이에게 남은 것이라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공부였다. 철민으로서는 어쩌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산골짜기에 처박혀 공부에만 열중하여 많은 실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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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에게 모든 것을 종지부 찍을 비보가 날라온 것이다. 택시를 운전하던 박영일이가 금암동 로타리에서 인사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한 철민은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했다. 지금 같으면 보험이 있어 당사자끼리 해결하면 여러 가지로 유리하지만 그 당시에는 종합보험이라는 게 없었고, 책임보험만 있어 일단 사고 그 자체가 망해가는 지름길이었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바로 사고 현장에서 구속돼 경찰서로 갔고, 철민이는 사고 해결을 위해 차를 팔아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철민이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골에서는 돈 붙여주지 않는다고 아우성이고, 차 사고는 나서 사업은 이미 망해버리고, 당장 돈이 없으니 오고 갈 때는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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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에서 우선 지혈제를 맞고 피는 멈추었는데, 기도에 남아 있던 피가 굳어 있어 숨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핏덩어리를 기구로 끌어냈다. 마치 붉은 선지 덩어리 모양처럼 그 핏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집으로 온 철민이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도 원했던 사법고시는 응시 한 번도 못하고, 오히려 생명의 불꽃이 점점 꺼져만 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우선 급한 것이 병명을 아는 것이었다.
전주도립병원(현 예수병원)에 가서 진단해 본 결과, 폐병 말기(肺病末期)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담당의사는 왜 이렇게까지 되도록 놔두었냐며 병원에 따라온 의모께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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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온몸에 통증이 있어 죽을 고통이었는데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가슴이 불안하며 벌렁벌렁했는데 마음이 편하기 시작했고, 기침을 조금 덜 하게 되므로 자연히 목구멍에서 피(각혈)도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머리맡에 둔 용약이 떨어지면 나도 죽는 것이란 것을 철민이는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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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살려주세요.
철민이는 마지막이라는 최후의 결심으로 혈족이라고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혈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는 여덟 살 때 헤어진 뒤 20년 가까이 되도록 한두 번 만나본 적이 있어 어머니인데도 막상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절박한 처지에서는 어느 때보다 어느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아쉬움이 아련히 떠올라 살아도 죽어도 최후의 결단으로 혈서를 띄워 보기로 작심했다.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을 깨물어서 “어머니 살려주세요.”라는내용으로 혈서를 써서 서울 수유리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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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날씨는 가을이므로 밤에는 싸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철민이는 하얀 창호지와 초 두 자루를 사서 세일극장 뒷산의 원두막으로 가 애인을 옆에 앉혀 놓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혈서의 내용은 모든 마음, 모든 힘, 모든 삶이 함축되고 또 함축된 비장한 내용으로 한자로 지혈(指血, 손가락으로 씀)해 내려갔다. 즉, 일애사수결(一愛死守決)이라고,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비장한 결심을 한다는 뜻이었다.
*
철민이는 궁핍함을 잠시라도 피해 볼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은 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계획도 세워 아무 시내버스를 타고 목적지 없이 하루 종일 차만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약수동 내리막길을 가던 시내버스가 어린아이를 즉사하게 한 사고가 난 것을 목격한 철민이는 절대로 운전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임시 거처를 이모님 집으로 정했지만, 한방에서 네 식구가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처지인데도 철민이는 그곳에서 살지 않으면 그나마도 갈 곳이 없었다. 한 달가량 하는 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을 때, 이모님께서 너 무엇을 하고 싶냐며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자 철민이는 무심코, “역학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
글을 쓸 때에는 삼일 밤낮을 계속 쓰기도 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불철주야 식으로 노력한 결과, 수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고, 운명의 원전(原典)에 버금가는 주역 팔괘 예언비록(周易八卦 豫言秘錄)인 《운명(運命)》이란 책도 저술하고 있었다.
책을 나름대로 저술하고 있었지만 시중에는 단 한 권도 내지 못했다. 저술에 목을 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것도, 온갖 정력을 쏟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학교라곤 문전도 구경도 못했던 철민이가 사회로부터의 인정을 확인해보려는 숨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튼 《운명》이란 책을 전후하여 2007년도까지 무려 백여 권의 저서를 쓰게 된 것이다. 이는 철민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초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게 아닌가라고 되돌아본다. 특히 50종 정도는 깨알 같은 붓글씨(육필)이였으므로 지금 그 책을 보면 내 자신도 놀란다.
*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는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라 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비관하지 않는 것이 군자이며, 만약 비관하고 타인들이 꼭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반대로 군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는 군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군자의 흉내는 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그런가 하면, 부지천명不知天命은 무이위군자야無以爲君子也라 했다.
그러니까 하늘의 운명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서 평화로웠던 가정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날품팔이로 삶을 유지했고, 심한 때에는 초근목피로 허기진 배를 채웠으며, 그래도 안 될 때에는 굶기가 일쑤였다. 농토라곤 쌀 두서너 가마, 콩 한두 가마가 전부였다.
살길이 막막한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네 살 난 철민이를 데리고 재가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씨받이 재혼 내지 호구지책을 위한 결혼이었다.
왜냐하면 재혼 당시에 딸을 다섯을 낳아 기르고 있는 본처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후사를 보기 위해서 어머니를 씨받이로 들인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버릴 수 없는 물건, 그것도 골치 아픈 혹인 철민이를 데리고 재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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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의 나이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마을 어귀 주막집(구멍가게 비슷한 술집)에 꼴망태를 깔고, 술 먹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자 희망이 돼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술 먹는 사람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빵쪼가리와 오징어 다리를 던져주곤 했다. 이러한 음식을 먹는 재미가 쏠쏠하여 꼴망태만 매고 나서면 그 주막집에 가서 술 먹는 사람이 던져준 과자며 오징어 다리를 똥개처럼 받아먹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자 행복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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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이는 당숙모의 간곡한 부탁에 그 공부방을 어렵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을 생각 외로 빨리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철민이의 가슴속에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 가는 또래들을 보면 부러워했고, 그 부러움에 못 이겨 남모르는 눈시울을적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던 철민이가 독학으로 상당한 한문 실력을 갖춘 것도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다. 오히려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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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에서도 철민이는 여전히 공부를 계속했다. 다른 머슴과 같이 새끼를 꼬고, 짚신을 만들고, 꼴망태를 만드는 등 머슴으로서 할 일은 다 하면서 다른 머슴들이 잠잘 때 철민이는 호롱불을 가려가며 외로이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에게 눈물어린 간청으로 서당을 다시 다니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초저녁에 할 일을 서당에서 먼저 공부를 한 까닭에 머슴들이 잠이 들고 있을 때 멍석 만들고, 새끼 꼬는 일을 하기 때문에 머슴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야! 철민아 머슴 주제에 뭔 공부를 해. 공부 더해서 정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할 것도 아닌데, 잠도 안 자고 올빼미처럼 공부만 해. 어서 불 꺼, 인마! 너 때문에 못 살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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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눈이 뽀얗게 내리고 혹독한 겨울이었다. 철민이는 친구 병주네 작은 방에서 만들고 있던 멍석(덕석 방언)을 집어치우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전북 남원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막상 결심을 하고 보니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머슴살이를 하면서 마땅히 잠잘 자리가 없어 회관이며, 선신기 집이며, 전광수 방 등을 전전긍긍하다가 병주의 배려로 불이 나 새카맣게 타 버린 사랑채 방을 빌려주면서 우선 여기서 자도록 하라는 등의 추억은 출세하겠다고 결심한 철민이의 마음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꼭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든 고향 땅을 떠나야만 했다. 때는 바야흐로 철민이 나이 19세에 전북 남원행 버스에 몸을 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차창 밖을 보면서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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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 조수란 직업이 무엇을 하는 거냐고 반문할 정도로 생소한 직업이지만 1960년대에는 화물차, 버스는 물론 택시마저도 조수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버스에는 조수 아래에 차장(車掌)까지 두어 서열로 따지면 차장, 조수, 운전사 식으로 구성돼 있었다. 운전사는 물론 차장 조수란 직업은 그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내면을 살펴보면 월급보다 외수입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오일장날 같은 때에는 과외 수입이 많았다. 그 이유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하지도 않고 소말 달구지(우마차)가 주류이고, 반면 농산물을 팔아야만 현금을 만져 볼 때라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짐(화물)이 많아 장날에 장터를 경유하게 되면 쌀 한 가마는 운임이 얼마, 사람 한 명당은 운임이 얼마 등등 실로 놀라울 만큼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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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지 않은 그믐에는 조수들의 절호의 기회이다. 왜냐하면 껌껌해서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좋은 기회인 셈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처녀, 기혼 여성 등이 많이 모여 목욕을 하게 된다. 이러한 기회를 봐 조수들이 잠수 목욕을 같이 한다.
그 당시의 사회 젊은이들은 장발이 많을 때라 어두운 밤에 목욕을 하게 되면 여성 단발 머리카락인지, 남성 조수들의 머리카락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조수들은 물속으로 잠수하여 처녀들의 몸과 스치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을 일부러 스치는가 하면 때로는 만지기까지 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성인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묵인한 처녀들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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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를 그만두고 하숙을 하면서 운전 면허시험 공부와 일반행정직 시험에 대비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 대신 조수 일을 하고 있던 김종우가 전북 부안에서 토목공사를 하던 중 차를 정비하다가 덤프가 내려와 깔려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철민이가 그 차 조수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니까 철민이가 현정리에서 나무하러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것이나, 종수가 철민이 대신 잠깐 조수로 갔다 죽은 것이나, 이번에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부안 가서 불귀의 객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 경우를 생각하면 철민이는 20대 초반에 무려 세 번의 죽음을 빗겨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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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만 따면 만병통치 만사형통(萬病通治 萬事亨通)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철민이의 삶은 정반대였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철민이는 밤잠을 설치며 차 정비도 완벽하게 하고, 공부에도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마땅한 기숙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함바집(공사 인부들 밥 먹는 식당)에서 자거나 아니면 차에서 자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건축 현장이라 본인 밥도 손수 해먹어야 하고, 시장에서 부식도 사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전사가 운전하는데 불만이 없도록 차 정비도 꼼꼼히 해야 하며, 짬을 내 공부도 해야 하는 등 실로 면허가 없을 때의 조수만 못한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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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며칠간 운전을 하면서 사장에 대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넝마주의 총대장이란 것이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조폭 보스인 것이다. 총대장 아래에 20~30명씩 넝마주의를 데리고 있는 구역장 즉, 중간 보스들만 수십 명에 달했고, 총 인원은 400~500명 정도였다.
전주 시내 다리 밑의 집합소만 서서학동 다리, 중화산 다리, 용머리 고개 다리 등 수십 곳이었고, 다리 아닌 대표적인 집합소는 노송동, 용머리 고개 개천 근처 효자동 등 역시 수십 군데였었다.
또 전라북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곳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중 오수, 순창, 남원, 김제, 이리, 군산이 대표적이었다.
총대장인 신기영(가명)은 중간 보스들을 모아 놓은 각종 고물과 넝마를 수집하여 공장에 직접 판매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돈은 번다고 하기보다는 주워 담는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었다.
철민이가 하는 일은 바로 각 집합소마다 다니면서 고물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총대장인 신기영 사장과 같이 다녔지만, 점점 익숙해지자 철민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철민이 혼자서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철민이 자신이 총대장 행세를 한 것이다. 다리 밑을 가면 수십 명 넝마주의들이 차렷 자세로 인사부터 하고, 그다음 본 업무에 들어가는 것이 그 계통의 하나의 룰이었다. 그러니 철민이도 자연히 그들을 닮아간 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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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묘한 인연에, 끈이 다가왔다. 한때 암흑가 보스로 있을 때 알게 된 김영춘(가명), 일명 갈고리가 갑자기 찾아왔다. 갈고리라는 별명은 오른손이 절단 돼 의수(義手)를 쇠갈고리로 만들어 누가 보아도 위협적이었다. 얼굴은 칼자국 흉터가 여기저기 있었고, 한쪽 눈마저 실명돼 그 자체가 험상궂게 생긴 것이다. 만약 음식점이나 술집에 가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탁을 갈고리로 찍어 뒤집어엎는 등 대하기 힘든 친구였다.
갑자기 찾아온 영춘은 철민이에게 전주로 다시 가자는 것이었다. 철민이가 완강히 거절하고 다음 어느 때까지 오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몰아 멀리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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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이는 낙방의 상처가 의외로 큰 것은 그만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철민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전주남문시장 개천 변에 위치한 철학관을 들어가 공부는 남 못지않게 자신하는데 왜 시험에 떨어질까요, 하고 당돌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당시로는 알아듣지 못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사주에 관성(官星, 명예, 벼슬, 직업을 상징)이 없어.”
철민이는 자세를 가다듬고, 불쾌한 어조로 따지듯이 물었다.
“관성이 무엇인데요? 그런 것이 뭐가 필요해요? 아 공부 잘해
서 실력 좋으면 시험은 당연히 합격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관상이 무슨 합격을 좌우해요”
안경 너머로 철민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노인은 철민이의 말이 기가 찬지 혀를 찼다.
“자네 같은 사람하고는 이야기하기도 싫으니, 어서 가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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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험발표를 기다리면서 광주에서 사 온 《역술전서》를 열심히 보았다. 그 책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 전문인이 아니어도 이해가 가능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하여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래야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지만 과거를 보니까, 부선망(父先亡, 아버지가 먼저 죽은 것)을 운운한 것과 조출타향(早出他鄕, 일찍 고향을 떠나온 것)이 이러고저러고 한 것 등 실로 눈으로 보듯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철민이는 어쩌다 그런 것이지, 누구나 다 맞겠나, 미신이야 미신, 사법고시 합격하여 판검사가 될 내가 이런 미신을 믿다니, 이런 것은 낙오자들이나 보는 것이지, 참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건방지고 인간 이하로 취급될 생각과 말이었다. 그때 생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 있고 빽 있고, 머리 영리하면 최고라는 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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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세월은 흘러 겨울이 다가 와 철민이가 강원도 온지 어언 3년이 다된 것이다. 삶이야 어쨌든 철민이에게 남은 것이라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공부였다. 철민으로서는 어쩌면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산골짜기에 처박혀 공부에만 열중하여 많은 실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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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에게 모든 것을 종지부 찍을 비보가 날라온 것이다. 택시를 운전하던 박영일이가 금암동 로타리에서 인사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한 철민은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했다. 지금 같으면 보험이 있어 당사자끼리 해결하면 여러 가지로 유리하지만 그 당시에는 종합보험이라는 게 없었고, 책임보험만 있어 일단 사고 그 자체가 망해가는 지름길이었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바로 사고 현장에서 구속돼 경찰서로 갔고, 철민이는 사고 해결을 위해 차를 팔아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철민이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골에서는 돈 붙여주지 않는다고 아우성이고, 차 사고는 나서 사업은 이미 망해버리고, 당장 돈이 없으니 오고 갈 때는 없고 참으로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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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에서 우선 지혈제를 맞고 피는 멈추었는데, 기도에 남아 있던 피가 굳어 있어 숨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핏덩어리를 기구로 끌어냈다. 마치 붉은 선지 덩어리 모양처럼 그 핏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집으로 온 철민이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도 원했던 사법고시는 응시 한 번도 못하고, 오히려 생명의 불꽃이 점점 꺼져만 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우선 급한 것이 병명을 아는 것이었다.
전주도립병원(현 예수병원)에 가서 진단해 본 결과, 폐병 말기(肺病末期)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담당의사는 왜 이렇게까지 되도록 놔두었냐며 병원에 따라온 의모께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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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온몸에 통증이 있어 죽을 고통이었는데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가슴이 불안하며 벌렁벌렁했는데 마음이 편하기 시작했고, 기침을 조금 덜 하게 되므로 자연히 목구멍에서 피(각혈)도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머리맡에 둔 용약이 떨어지면 나도 죽는 것이란 것을 철민이는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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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살려주세요.
철민이는 마지막이라는 최후의 결심으로 혈족이라고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혈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는 여덟 살 때 헤어진 뒤 20년 가까이 되도록 한두 번 만나본 적이 있어 어머니인데도 막상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절박한 처지에서는 어느 때보다 어느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그리움과 원망, 그리고 아쉬움이 아련히 떠올라 살아도 죽어도 최후의 결단으로 혈서를 띄워 보기로 작심했다.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을 깨물어서 “어머니 살려주세요.”라는내용으로 혈서를 써서 서울 수유리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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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날씨는 가을이므로 밤에는 싸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철민이는 하얀 창호지와 초 두 자루를 사서 세일극장 뒷산의 원두막으로 가 애인을 옆에 앉혀 놓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혈서의 내용은 모든 마음, 모든 힘, 모든 삶이 함축되고 또 함축된 비장한 내용으로 한자로 지혈(指血, 손가락으로 씀)해 내려갔다. 즉, 일애사수결(一愛死守決)이라고,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비장한 결심을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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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이는 궁핍함을 잠시라도 피해 볼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은 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계획도 세워 아무 시내버스를 타고 목적지 없이 하루 종일 차만 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약수동 내리막길을 가던 시내버스가 어린아이를 즉사하게 한 사고가 난 것을 목격한 철민이는 절대로 운전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임시 거처를 이모님 집으로 정했지만, 한방에서 네 식구가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처지인데도 철민이는 그곳에서 살지 않으면 그나마도 갈 곳이 없었다. 한 달가량 하는 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을 때, 이모님께서 너 무엇을 하고 싶냐며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자 철민이는 무심코, “역학자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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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에는 삼일 밤낮을 계속 쓰기도 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불철주야 식으로 노력한 결과, 수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고, 운명의 원전(原典)에 버금가는 주역 팔괘 예언비록(周易八卦 豫言秘錄)인 《운명(運命)》이란 책도 저술하고 있었다.
책을 나름대로 저술하고 있었지만 시중에는 단 한 권도 내지 못했다. 저술에 목을 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것도, 온갖 정력을 쏟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학교라곤 문전도 구경도 못했던 철민이가 사회로부터의 인정을 확인해보려는 숨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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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운명》이란 책을 전후하여 2007년도까지 무려 백여 권의 저서를 쓰게 된 것이다. 이는 철민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초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게 아닌가라고 되돌아본다. 특히 50종 정도는 깨알 같은 붓글씨(육필)이였으므로 지금 그 책을 보면 내 자신도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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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는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라 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비관하지 않는 것이 군자이며, 만약 비관하고 타인들이 꼭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반대로 군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는 군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군자의 흉내는 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그런가 하면, 부지천명不知天命은 무이위군자야無以爲君子也라 했다.
그러니까 하늘의 운명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군자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