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오, 루칠리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시간뿐, 그 외는 모두 타인의 것이라오.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해준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사라지는 시간뿐이오.
하지만 이조차 누구든 원한다면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있소.
사람들은 타인이 소유한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오. -세네카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인류가 시공간을 인지하던 날 이후 ‘시간’은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괴물이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공간은 어찌어찌 정복이 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은 길들여지지 않은 태초의 모습 그대로 남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던 세네카의 탄식 이후 시간을 정복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에는 놀랄 만한 가속도가 붙었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비행기로 갈아탔고 전보와 전화기, 컴퓨터를 만들어냈으며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해줄 온갖 신약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시간 부족 현상은 더욱더 심화하고 있으며, ‘시간 강박’에서 벗어날 날 역시 요원한 듯 보이기만 한다.
여기, 82년이라는 온 삶을 바쳐 ‘시간’이란 괴물과 꿋꿋하게 마주했던, 그리하여 영원한 난제처럼 버팅기던 ‘시간’을 마침내 온순하게 길들인 사람이 있다. 50년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통계’ 노트를 작성하면서 시간의 속성과 존재감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의 가치와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해냈던 사람. 정직하고 행복하게 한 세상을 살았고, 살아서보다 죽은 후 그 삶의 위대함을 인정받으며 결국은 ‘시간’이 사려 깊은 친구였음을 확인시킨 사람…….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능성의 최대치를 살고 간 사람!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과 독특한 관계를 맺으며 학문 연구와 도덕적 자기 삶의 완성에 몰두했던 한 과학자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조명한 책이다.
1972년 8월 31일, 구소련의 곤충분류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Aleksandr Aleksandrovich Lyubishev가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평범하고 소탈한 연구자로 살다 간 그가 세상에 남겨놓은 것은 70여 권의 학술서적과 총 1만 2,500여 장(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논문, 그보다 방대한 양의 학술자료 및 꼼꼼하게 제본한 수천 권의 소책자들이었다.
생전에 류비셰프와 교류를 가졌던 국내외 지식인들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원고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 밝혀지는 류비셰프의 학문적 성취 및 철학과 역사, 문학과 윤리학 등을 전방위로 넘나들며 성실하고 해박한 논리를 펼쳐낸 그의 독창적 이론에 그들은 다시 한번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8시간 이상 자고 산책과 운동을 즐겼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줄줄 외우고 주요 공연과 전시는 빠짐없이 관람했던 류비셰프였다. 게다가 당대 대다수 남자들이 그렇듯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와 연구소 직원으로 일했고, 각종 학술세미나와 국책 사업을 위해 한 해에도 몇 달씩 전국 각지를 순회해야 할 만큼 쉴 틈이 없는 그였다. 볼셰비키 혁명과 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가파른 물살은 그의 삶이라고 비켜 가주지 않았다.
도대체 그의 삶에 어떤 가공할 비밀이 있어 이토록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먼저 그는 누구였을까? 1973년, 류비셰프 사망 1주기를 맞아 개최된 학술회의에서 사람들은 류비셰프라는 불가사의한 인물을 규정해내기 위해 절절매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생물학자라고 일컬었고 또 다른 사람은 역사학자라고 말했으며, 곤충학자 혹은 수학자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발표자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류비셰프가 탄생했던 것이다.
“진화론과 유전학에까지 도전장을 내민 그는 혁명가였습니다.”
“류비셰프는 어떤 유파의 철학에서든 거기에 비판과 창조성이 담겨 있으면 그것을 매우 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수학적 천재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증론자였습니다.”
“그는 유물론자였습니다.”
그들 모두 생전의 류비셰프와 교분을 맺었고,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각자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용들이 얼마나 지엽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는지 깨달으며 당혹스러워했다.
영웅적이지 않았으나 위대했다,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류비셰프 생존 당시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교류를 지속했던 전기작가 다닐 그라닌Daniil Alexandrovich Grankn이 류비셰프의 비밀스럽고 위대한 삶을 추적해낸 전기이다. 그라닌은 말년에 류비셰프가 체류했던 울리야노프스크를 방문해 그가 남긴 방대한 원고들을 여러 날에 걸쳐 검토했다. 그러던 중 매우 흥미롭고도 소중한 단서를 발견했다. 유고에서 나온 ‘시간통계’ 노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언뜻 무미건조한 일기장처럼 보였던 이 노트를 꼼꼼히 분석하던 그라닌은 베일에 싸인 류비셰프의 인생관과 학문관, ‘괴력’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성취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를 찾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은, 류비셰프의 ‘시간’에 있었다. 스물여섯 살부터 시간통계 노트를 작성해온 그는 지금껏 그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방법으로 도처에 깔린 시간을 ‘채굴’해냈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의 완성으로 향하는 위업을 달성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치밀한 취재와 저자 그라닌의 풍성한 사유, 빼어난 문장력이 잘 어우러진 이 책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1974년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유럽과 중국 등 여러 나라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또 초판 발행 5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 증쇄를 거듭하며(러시아의 경우, 몇몇 베스트셀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책들이 초판만 발행돼 도서관에 비치되고 증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국 학자와 기업인들이 주목해서 읽고 토론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이 책을 저술한 50대 후반 이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저자 그라닌은 지난 2017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4년 초판 출간 당시 저자로부터 이 책의 한국어 판권을 영구 양도받은 황소자리는 책 속 주인공 류비셰프와 저자 그라닌의 숭고한 생애를 기리면서 달라진 시대에 맞게 책에 새 옷을 입혀 개정판으로 출간했다.